청양에 가다/ 나 태 주
이번에는 대전케이비에스 촬영 팀을 따라 청양엘 갔다. 청양은 충남지역에서는 가장 지대가 높은 고장이다. 그래서 충남의 알프스라고도 불린다. 청양. 한자를 풀어보면 푸른 햇빛이 된다. 과연 청양엔 푸른 햇빛이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야말로 청양은 산 높고 물 맑은 고장이다.
개인적으로 청양은 나에게 둘째누이가 시집 가 살고 있는 땅이다. 스물 한 살 어린나이의 누이였다. 함박꽃 같았다 할까. 이슬 속에 막 피어나 어여쁨을 한껏 자랑하던 누이였다. 옛날의 일이긴 하지만 스물 한 살이라면 너무나 이른 나이의 신부였다. 청양으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고개 마루길. 소쩍새 뻐꾸기 재게 울어 슬픈 생각이 묻어나는 푸른 산 고개, 고개를 넘어 누이는 시집을 갔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큰 오래비 주제이면서 나는 누이의 결혼식장에서 눈이 붓도록 울고 말았다. 딸꾹질처럼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울음이었다. 아마도 스물여덟 되도록 짝을 찾지 못한 노총각의 설움이 북받쳤지 싶다. 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창에서 듣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내 울음을 받아서 그리 서럽게 우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 이후로 청양은 누이의 땅이 되었다. 맘씨 곱고 예쁘고 착한 누이가 시집가서 사는 땅. 그래서 청양은 나에게 누이와 동격이 되었다. 사랑스런 고장, 그리운 고장이 되었다.
이른 아침시간 도착한 곳은 고추시장. 아른바 매꼼하고 뒷맛이 깨운한 청양고추가 사고 팔리는 현장을 보았다. 고추시장을 둘러보다가 만난 너부데데 얼굴이 크고 지극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닌 아주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은 나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고추는 인물 보고 먹는 거이 아니여. 맛을 보고 먹는 거이지.
고추시장을 보고 다음에 들른 곳은 청양의 재래시장. 좁은 시장 마당 가득 아주 많은 물건들이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다 나왔다 그럴까. 특히 쪼글쪼글 마른 대추처럼 늙으신 할머니가 들고 나온 약초들이 눈물겨웠다. 아주 조그맣게 단을 지어 놓은 약초더미들. 아는 대로 황개나무 뿌리라든가, 느릅나무 껍질이 보였다. 가운데는 풋내 나는 산초 열매도 한 바구니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안쓰러워 검정콩 한 되를 삼천 원 주고 샀다. 물건을 받고 천원을 웃돈으로 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는 할머니였다.
그 옆으로는 빨갛게 익은 오미자 열매도 보였다. 한 불럭 건너편으로는 묵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청포묵, 어묵, 상수리 묵, 그리고 두부. 모두가 집에서 만든 물건이라기에 다시 두부 한 모를 샀다. 두부를 담은 봉지를 들고 돌아서려는데 발길에 차이는 것이 있었다. 구절초였다. 아직은 꽃도 피지 않은 걸 뽑아다 사내끼로 촘촘히 엮어서 쌓아놓았다. 아마도 약초로 파는 모양이었다.
아이쿠, 벌써 구절초가 다 나왔네.
그것은 이 고장에도 다시 가을이 찾아왔음을 나름대로 절감한 시골 아낙네의 감탄사였다.
몇 군데 더 다녀 마지막 행선지는 고운 식물원. 11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이용해 꽃과 나무를 심어 가꾸는 식물원이라는데 다른 어떤 식물원과는 달리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조성한 식물원이라는 것이 특별했다. 고운 식물원에는 일하는 사람들도 특별했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좀은 늘어지고 어둔한 인상일 수도 있겠는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바짝 긴장된 듯싶었고 무언가 사명감이랄지 목표의식 같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주로 담당해준 사람은 지수진이라는 이. 지 과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다니며 요모조모 듣고 배운 바가 많았다.
계절에 따라 꽃들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봄에 피는 꽃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킨다고 한다. 누구라도 식물원에 와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기분이 고조되어 말소리도 높아지고 발걸음도 빨라진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피는 꽃은 사람의 마음을 착 가라앉게 해준다 한다. 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식물원에 핀 가을꽃들을 오래 동안 바라보고 내려오면 화가 풀리고 편안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 동안 식물원에서 근무하면서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라니, 아무래도 믿어주어야만 될 이야기 같았다.
여름 꽃들이 소란스럽게 놀다가 떠나간 식물 곳곳에는 가을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곰취, 마타리, 꽃무릇, 물봉선, 비비추, 과꽃, 샐비어, 달리아, 풍접초, 국화 같은 꽃들은 나도 알만한 이름들이었다. 역시 꽃이나 나무는 그 이름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일단 이름을 알고 보면 가까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꽃과 나무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된다.
식물원을 내려오면서 활짝 핀 구절초 군락을 만났다. 벌써 이렇게 구절초가 피었나? 지 과장에게 물으니 한발 앞서 피는 꽃으로 이름이 연흥구절초라 한다. 조금은 쓸쓸하고 서글프고 소소(疎疎)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우리네 조선의 아낙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청양 땅은 산이 높고 물이 맑은 땅. 바람까지 푸르른 고장. 그곳에 고운 누이 하나 살고 있기에 곱기도 한 고장. 청양이여, 잘 있거라. 누이여, 부디 거기서 잘 살거라. 연흥구절초여, 너 거기서 가을날을 서럽고도 어여쁘게 피어있거라. 나는 짧은 날의 가을 여행을 마치며 마음속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2009.9.29)
*지수진 과장님
이 글은 <산사랑>이란 격월간 잡지, 2009년 11+12호에 보내려고 쓴 글입니다. <산사랑>이 나오면 편집기자에게 한부 보내라 하겠습니다. 이 글 속에 나오는 <연흥구절초>가 맞은 건지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